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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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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루이나]][[분류:랜드사]] [목차] [clearfix] == 개요 == '''검은 10년'''(Black Decade)은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루이나]]에서 정치적 폭력이 일상화된 시기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기간 극좌 무장조직의 요인 납치와 표적 암살, 극우 조직의 무차별 폭탄 테러, 조직범죄 집단 간의 항쟁이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공식 집계 기준 835명이 사망하고 4,100여 명이 부상했다. 무장 공격은 3,861건, 납치는 404건이 접수되었다. 이 시기를 다른 나라의 정치 폭력기와 구별짓는 특징은 폭력의 상당 부분이 국가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는 점이다.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국방부 특무처]]가 1958년부터 집행한 제방 계획은 극우 조직 [[공화국의 방패]]를 양성해 극좌의 범행으로 위장한 테러를 실행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조직이 통제를 벗어나자 국가는 자신이 만든 조직을 제거하는 작전에 착수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무장 충돌이 검은 10년의 기점이 되었다. 동시에 제방 계획으로 누명을 쓰고 처벌받은 극좌 조직은 그 경험을 근거로 실제 무장조직으로 재편되었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가 이 시기를 두고 "국가가 만든 허구가 실체가 되어 국가를 공격한 10년"이라고 기록한 것은 이 구조를 지적한 것이다. 검은 10년은 1978년 [[10.10 군사반란]]의 직접적 명분을 제공했다. 문민 정치로는 폭력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군정은 실제로 폭력 지표를 급감시켰으나 그 진압은 무장조직에 국한되지 않았다. 폭력의 종식이 제도적으로 완결된 것은 1980년 헌정 회복 이후 도입된 협력자 감형 제도를 통해서였으며, 마지막 대규모 무장조직인 [[혁명적 노동자동맹]]이 소멸한 1982년이 통상 종료 시점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시기가 루이나 사회에 남긴 영향은 정치 제도에 대한 장기적 불신, 무장 시위 문화의 정착, 그리고 정보기관에 대한 감독 제도의 도입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 명칭과 시기 구분 == === 명칭 === 검은 10년이라는 표현은 1979년 3월 시사주간지 《코망테르》에 실린 기고문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필자는 당시 사망자 통계를 인용하면서 이 시기의 사망자 대부분이 총탄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들어 이 표현을 제시했다. 명칭은 1980년대 초 언론과 학계에서 일반화되었고, 1985년 발간된 첫 통사적 연구서의 제목으로 채택되면서 표준 용어로 정착했다. 이 명칭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검은색이 극우를 상징하는 관행상 이 명칭이 시기의 폭력을 극우에 귀속시키는 인상을 준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며, 사망자 기준으로는 극우 소행이 다수이나 사건 건수 기준으로는 극좌 소행이 다수라는 점에서 어느 쪽으로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학술 문헌에서는 정치폭력기, 무장투쟁기 등의 중립적 표현이 병용되나 일반 용법에서는 검은 10년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 시기 구분 === 시작 시점에 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통설은 1970년 2월 국가안보회의가 [[공화국의 방패]] 지도부를 표적으로 지정한 결정을 기점으로 본다. 이 결정으로 국가와 자신이 양성한 무장조직 사이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그 교전이 이후 10년간 이어진 폭력의 첫 단계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1966년 벨포르 지하철 아르덴역 폭발을 기점으로 삼는다. 이 사건과 그에 뒤따른 오심이 이후 극좌 무장조직 발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므로 인과의 출발점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는 논리다. 세 번째 견해는 1971년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무장조직 재편을 기점으로 보며, 좌우 양쪽의 무장조직이 병존하게 된 시점이라야 이 시기의 성격이 성립한다고 본다. 종료 시점에 관해서도 견해가 갈린다. 1980년 [[10.24 시민혁명]]과 헌정 회복을 종료로 보는 견해가 명칭상 10년이라는 기간과 부합해 널리 쓰이나, 무장조직의 실질적 소멸은 1982년이므로 종료를 1982년으로 잡아야 한다는 견해도 유력하다. 후자를 따르면 이 시기는 12년이 되어 명칭과 어긋나는데, 이 때문에 명칭을 유지하면서 종료를 1980년으로 두되 1980년부터 1982년까지를 잔여기로 별도 처리하는 방식이 학술 문헌에서 관행적으로 사용된다. 이 문서는 통설을 따라 1970년 2월부터 1980년 10월까지를 본 시기로, 1980년 10월부터 1982년까지를 잔여기로 다룬다. == 배경 == === 제방 계획 === 검은 10년의 구조적 원인은 1957년 국가안보회의가 승인한 제방 계획이다. 계획의 골자는 정부가 직접 좌파를 탄압하는 대신 민간 극우 조직을 양성하고, 그 조직으로 하여금 극좌의 범행으로 위장한 테러를 실행하게 하며, 이를 통해 좌익의 위협을 국민에게 각인시켜 공산주의의 정치적 기반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실행은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특무처]] 제4과가 담당했고, 1958년 3월 결성된 [[공화국의 방패]]가 실행 조직이었다. 계획은 표면적 목표를 달성했다. 1959년부터 1968년까지 여섯 건의 위장 테러가 집행되어 32명이 사망했고, 1966년 아르덴역 폭발로 19명이 사망한 뒤 실시된 조사에서 국내 공산주의 세력을 최대 안보 위협으로 꼽은 응답은 78%에 이르렀다. 1960년 반체제활동규제법 개정으로 좌파 단체의 등록·해산 요건이 강화되었고, 1968년 선거에서 좌파 정당의 의석은 이전 선거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러나 계획은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국가가 훈련시킨 무장 극우 조직이다. 방패는 1969년 시점에 회원 43,000명, 훈련받은 행동대 3,200명, 14개 지부를 보유한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고, 노스클리프 산악 훈련장에서 사격·폭발물·시가전 교육을 받은 수료자는 1958년부터 1969년까지 약 1,100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하지 않은 일로 처벌받은 좌파다. 1967년 검거된 혁명적 노동자동맹 조직원 23명 가운데 11명이 아르덴역 사건의 실행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장기형을 복역했다. === 통제 이탈과 회수 작전 === 방패는 1965년을 전후해 특무처의 자금에서 독립하기 시작했다. 조직이 설립한 경비 용역 회사가 실제 영업으로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1963년부터 기업으로부터 노동조합 파괴 용역을 직접 수주했으며, 1967년에는 특무처 제5과가 운영하던 아편 반입 경로의 국내 유통 부분을 장악했다. 자금이 독립하자 표적도 독립했다. 1967년 이후 방패는 제4과의 지정 없이 좌파 인사를 습격하기 시작했고, 1969년에는 대학 교수 1명과 노조 간부 3명이 조직의 승인 없이 살해되었다. 1969년 12월 톨루즈 지부장이 방패와 정부의 관계를 언론에 제보하려 한다는 첩보가 접수되면서 국방부는 조직의 처리를 안건으로 제출했고, 1970년 2월 국가안보회의는 방패 지도부를 표적으로 지정했다. 특무처는 같은 해 8월 롱비치 항만 창고에서 열린 지도부 회의를 습격해 총재 게오르기 A. 스트렐니코프를 포함한 9명을 사살했다. 사건은 아편 유통을 둘러싼 범죄조직 간 충돌로 위장되었으나 조직은 해체되지 않았고, 국가가 직접 훈련시킨 3,200명의 무장 인력이 지휘부 없이 남았다. === 총기 환경 === 루이나는 총기 소지가 합법인 국가이므로 무장 자체가 조직 결성의 장벽이 되지 않았다. 반자동 소총과 권총을 개인 명의로 합법 구입한 뒤 자동 사격이 가능하도록 개조하는 방법은 특무처 제5과가 교범으로 정리해 방패 각 지부에 배포한 것이며, 노스클리프 훈련 수료자를 통해 이미 민간에 확산되어 있었다. 폭발물도 마찬가지로 지부별 제조조가 사제로 제작하는 방식이 표준화되어 있었다. 이 조건은 검은 10년의 폭력이 다른 나라의 유사한 시기와 다른 양상을 띠게 만든 직접적 요인으로 지목된다. 무장조직이 국제 암시장이나 외국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무장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무기 유통 경로를 차단하는 방식의 대응이 성립하지 않았다. 1975년 총기 개조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총포화약류단속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이미 유통된 물량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 청북전쟁 === 1974년 발발한 [[청북전쟁]]에 루이나는 1975년 9월 참전해 1977년 7월 정전까지 병력을 유지했다. 양성 징병제 아래 징집된 청년 다수가 실전에 투입되었고, 종전 시점까지 참전 인원은 연인원 기준 23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은 세 가지 방향으로 검은 10년에 작용했다. 첫째, 실전 경험을 갖춘 제대군인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무장조직의 기술 수준이 상승했다. 1975년 이후 결성된 조직 가운데 폭발물 취급 능력을 갖춘 조직의 비율이 급격히 높아진 것은 이 유입의 결과로 설명된다. 둘째, 1975년 10월 띠에우리엔 대학살이 보도되면서 전쟁의 정당성을 둘러싼 갈등이 사회를 양분했고, 이 갈등에서 [[10월 전선]]이 분화했다. 셋째, 3년간의 파병이 남긴 재정 부담이 이후의 경제 위기를 심화시켰다. === 경제 === 1974년 이후 루이나 경제는 침체 국면에 들어갔다. 전비 부담과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이 겹치면서 물가 상승률은 1973년 4.1%에서 1975년 14.8%로 올랐고, 실업률은 같은 기간 3.2%에서 7.9%로 상승했다. 특히 콜마르·톨루즈·롱비치 등 중공업 도시의 실업률은 1976년 11%를 넘었다. 노사 갈등도 격화되었다. 파업 참가 인원은 1972년 연 34만 명에서 1976년 연 118만 명으로 늘었고, 파업 일수는 같은 기간 3.4배 증가했다. 이 갈등이 무장조직의 사회적 기반을 직접 형성한 것은 아니나, 조직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은신처를 제공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 정치 구조 === 제3공화국 후반의 정치 구조도 조건의 하나로 지목된다. 제방 계획의 효과로 좌파 정당의 의석이 크게 줄면서 의회 내 좌파의 대표성이 실제 지지 기반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었고, 제도 정치를 통한 갈등 해소의 통로가 좁아져 있었다. 1974년과 1978년 총선에서 좌파 정당의 득표율은 각각 24.3%와 26.1%였으나 의석 점유율은 17.8%와 19.4%에 머물렀다. 동시에 여당 내부의 분열로 1975년부터 1978년까지 내각이 네 차례 교체되어 평균 존속 기간이 9개월에 그쳤다. 정부가 일관된 대응 정책을 수립하지 못한 배경이 여기에 있으며, 1977년 조사에서 의회가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응답이 19%에 그친 것도 이 상황을 반영한다. == 전개 == === 제1국면 (1970~1973) === 1970년부터 1973년까지는 국가와 방패 잔존 세력의 충돌이 폭력의 중심이었다. 지도부 사살 직후 방패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했고, 온건파는 1971년 5월 해산을 선언한 반면 강경파는 콜마르 지부장 뤼시앵 바르도를 중심으로 지하화해 특무처를 상대로 보복에 나섰다. 이 시기 특무처 요원 6명이 살해되었고 요원의 가족이 표적이 된 사례도 2건 있었다. 특무처는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거나 수사를 의뢰할 수 없었고, 경찰은 방패의 성격을 알지 못한 채 이를 무장 범죄조직으로 수사했다. 1971년 벨포르 동부 지구 총격전에서 경찰 4명이 사망한 것을 비롯해 이 시기 경찰과 방패 강경파의 교전이 반복되었다. 이 국면의 사망자는 1970년 31명, 1971년 48명, 1972년 55명, 1973년 62명으로 완만하게 증가했다. 이 시기 사망자의 다수는 방패 관련이며, 극좌 무장조직에 의한 사망은 1972년에 처음 발생했다. 무장 공격 건수는 1970년 62건에서 1973년 241건으로 늘었으나, 이 가운데 상당수는 재산 손괴와 방화로 인명 피해를 수반하지 않았다. === 제2국면 (1973~1976) === 1973년부터 1976년까지는 극좌 무장조직이 확산되고 신극우가 등장한 국면이다. 1971년 재편된 혁명적 노동자동맹이 조직 규모를 키웠고, 1973년 [[프롤레타리아 행동대]]가 콜마르에서, 1975년 [[10월 전선]]이 벨포르에서 결성되었다. 극우 쪽에서는 1972년 질서회복단이 결성되어 방패와 무관한 계열의 무차별 테러가 시작되었다. 이 국면에서 폭력의 성격이 변화했다. 제1국면의 폭력이 국가와 특정 조직 사이의 사적 충돌에 가까웠던 반면, 이 국면의 폭력은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거나 국가 기구의 구성원을 직무를 이유로 표적으로 삼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1974년 5월 콜마르 시청 광장에서 방패 강경파 약 40명이 경찰 저지선과 4시간 교전해 경찰 7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한 사건은 이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되며, 이 사건 이후 도심 총격전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었다. 바르도는 이 교전에서 사망했고 방패 강경파는 이후 급속히 약화되어 1976년 지부 조직이 소멸했다. 사망자는 1974년 94명으로 급증했다가 1975년 88명으로 소폭 감소했고, 1976년 147명으로 다시 급증했다. 1976년의 증가는 8월 오보레 중앙역 폭발의 63명이 반영된 결과다. 무장 공격은 1974년 388건, 1975년 512건, 1976년 604건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 제3국면 (1976~1978) === 1976년 하반기부터 1978년까지가 검은 10년의 정점이다. 1976년 8월 오보레 중앙역 폭발과 1977년 4월 전 하원의장 앙리 뒤발의 납치가 잇따르면서 정부의 통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경제 위기와 노사 갈등이 겹치면서 의회 정치는 사실상 마비되었다. 무장 공격 건수는 1977년 741건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하루 평균 두 건이 넘는 수치이며, 같은 해 납치는 84건이 접수되었다. 다만 사망자는 1976년 147명에서 1977년 121명으로 감소했는데, 이는 이 해에 오보레 중앙역급의 대형 무차별 테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건 건수와 사망자 수가 반드시 함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이 시기 통계의 일반적 특징이다. 1977년 7월 청북전쟁이 정전으로 종결되면서 반전 운동에서 파생된 폭력의 동력은 약화되었으나, 다른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지 않았다. 1978년 무장 공격은 583건, 사망자는 109명으로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 제4국면 (1978~1980) === 1978년 10월 10일 [[10.10 군사반란]]으로 군정이 성립하면서 폭력의 양상이 다시 변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계엄을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한 뒤 무장조직에 대한 대대적 소탕에 착수했고, 통상의 형사 절차를 적용하지 않는 방식의 진압이 이루어졌다. 진압의 효과는 통계에 즉각 반영되었다. 무장 공격은 1978년 583건에서 1979년 297건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고, 1980년에는 141건으로 다시 절반이 되었다. 사망자는 1979년 54명, 1980년 26명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이 감소분에는 군정의 초법적 조치로 인한 사망이 별도로 집계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으며, 군정기 무장조직 관련자로 지목되어 사망한 인원 가운데 재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사례가 상당수 존재한다. 군정의 진압은 무장조직에 국한되지 않았다. [[NIA|국가정보국]]이 국내 사찰에 전용되었고, 광역범죄조사과는 군사경찰사령부에 흡수되어 사실상 소멸했으며, 정치인·언론인·노동운동가가 무장조직과의 연계 혐의로 대량 구금되었다. 특무처의 후신 조직은 이 기간 국내 작전 건수가 이전 3년 평균의 6배에 달했고, 정보 은폐 부문의 정원이 3배 이상 증가해 국내 여론 조작을 담당했다. 비달 파브르는 1978년 암살되었으나 국가비상위원회의 통치는 계속되었고, 1980년 10월 24일 시작된 [[10.24 시민혁명]]으로 붕괴했다. 전국에서 6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사흘간의 항쟁 끝에 10월 26일 국가비상위원회가 해체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시민이 무장하고 군 일부가 항명해 합류한 이 혁명은 검은 10년이 사회에 남긴 무장의 경험이 마지막으로 발현된 사건이기도 하다. == 극좌 무장투쟁 == === 발생 === 극좌 무장조직의 등장은 제방 계획의 직접적 산물로 설명된다. 1967년 아르덴역 사건의 실행범으로 검거된 혁명적 노동자동맹 조직원들은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 사실은 조직의 잔존 세력과 좌파 진영 일부에 국가가 좌파를 상대로 사건을 조작한다는 확신을 심었다. 다만 이 확신을 뒷받침할 증거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방패의 존재와 성격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수사 기록은 위장 명의가 지목한 방향으로만 작성되어 있었으므로, 조작에 대한 확신은 정황적 추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1971년 9월 12일 콜마르에서 혁명적 노동자동맹이 무장조직으로 재편되었다. 참여 인원은 1967년 증거 부족으로 석방된 9명과 대학·공장 출신의 신규 인원을 합쳐 40명이었으며, 창립 성명은 "우리는 하지 않은 일로 처벌받았다. 이제는 한 일로 처벌받겠다"는 두 문장으로 시작한다. 원 동맹과 재편 조직 사이에는 법적 연속성이 없고, 재편 조직이 이름을 의도적으로 승계했다. 이 승계의 논리는 당대에도 비판받았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범죄로 조직을 파괴했으므로 그 조직의 이름을 되찾고 씌워진 혐의를 실제로 수행함으로써 그 혐의가 거짓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이 조직의 주장이었으나, 좌파 정당은 무고함을 근거로 유죄를 자처하는 것이 국가의 조작을 사후에 정당화하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수사기관은 이후 재편 조직의 활동을 원 동맹 혐의의 사후적 근거로 활용했다. === 주요 조직 === 극좌 진영에서 실질적 규모를 갖춘 조직은 셋이었으며, 각각 사회적 기반이 뚜렷이 달랐다. [[혁명적 노동자동맹]]은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 존속한 조직으로, 대학과 공장에서 인원을 충원했다. 1977년 최성기 대원은 340명, 은신처 제공과 차량 조달 등에 관여한 지원 조직은 1,000명을 넘었다. 조직은 벨포르·콜마르·톨루즈·롱비치에 도시 단위의 종대를 두고 각 종대를 3~6명 단위의 세포로 나누는 구조를 채택했으며, 종대 간 인적 접촉은 종대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표적은 기업인과 법관이었다. 1974년 창립 지도부가 검거된 뒤 2세대 지도자 알랭 R. 도르망이 노선을 강경화해 표적을 사법·정치 영역의 고위 인사로 상향했다. [[프롤레타리아 행동대]]는 1973년 4월 콜마르에서 결성되었으며 교도소에서 발생한 조직이다. 창설자 에티엔 R. 보두앵은 정치 조직 경력이 없는 무장강도범으로, 콜마르 중앙교도소에서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들과 같은 사동에 배치되며 정치화되었다. 조직은 대원의 다수가 정치범이 아니라 일반 수형자라는 점을 결함이 아니라 이론적 귀결로 제시했다. 국가가 무고한 자를 가둔 이상 유죄판결은 진실의 확인이 아니라 국가의 선택이며 따라서 모든 수형자는 정치범이라는 것이 조직의 강령이었다. 표적은 교도관, 교도소장, 행형 담당 법관과 검사였고 탈옥 지원과 교도소 폭동 조직이 주된 활동이었다. 1975년 최성기 대원은 88명이다. [[10월 전선]]은 1975년 11월 벨포르에서 결성되었으며 청북전쟁 반대 운동에서 분화했다. 참전 제대군인과 반전 운동 학생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참전군인 출신 대원이 폭발물 취급과 군 시설의 구조에 관한 실무 지식을 보유했고, 이 때문에 소규모임에도 다른 조직이 접근하지 못한 표적을 다룰 수 있었다. 표적은 방위산업, 군 시설, 징병 행정이었다. 조직은 폭파 대상에 사전 경고를 보내 인명 피해를 배제하는 예고 원칙을 결성 선언에 명문화했으며, 검은 10년의 무장조직 가운데 인명 살상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유일한 사례다. 1977년 최성기 대원은 130명이다. 이 셋 외에 성명을 발표한 조직은 다수 존재했으나 대부분 실체가 없었다. 1979년 확인된 214개 조직 가운데 3건 이상의 공격이 확인된 조직은 21개, 10건 이상은 6개에 불과했다. 하나의 조직이 사건마다 다른 이름으로 성명을 내는 사례가 빈번했고, 조직명을 도용해 무관한 범죄를 정치적 행위로 포장하는 경우도 확인되었다. === 전술 === 극좌 무장조직의 전술은 다리 총격, 납치, 표적 암살, 자금 조달의 네 유형으로 정리된다. 다리 총격은 표적의 무릎이나 정강이를 사격해 살해하지 않고 불구로 만드는 방식이다. 살인에 비해 형량이 낮고 실행이 용이하며 표적이 생존해 사건이 지속적으로 회자된다는 점에서 선전 효과가 크다는 이유로 선호되었다. 검은 10년 동안 약 400건이 발생했으며 이 가운데 260건가량이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소행으로 확인되거나 추정된다. 피해자의 다수는 기업의 중간 관리직과 노무 담당자였고, 영구적 장애가 남은 사례가 절반을 넘었다. 납치는 기업 임원과 법관을 수 주에서 수 개월간 감금하고 조직 내부의 이른바 인민재판을 거쳐 처형하거나 석방하는 방식이다. 감금 기간의 중간값은 21일이었으며, 최장은 1977년 뒤발 사건의 51일이다. 납치는 정치적 선전과 자금 조달의 두 목적을 겸했고, 몸값을 요구한 사례와 요구하지 않은 사례가 병존했다. 표적 암살의 대상은 법관, 검사, 경찰 간부, 기업인이었다. 조직은 표적을 개인이 아니라 직무로 규정했으며, 성명에는 표적의 이름과 함께 그가 담당한 사건이나 직무가 명시되었다. 이 규정 방식은 표적의 대체 가능성 때문에 실효성이 낮다는 비판을 받았고, 실제로 살해된 법관의 후임이 같은 사건을 계속 담당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자금 조달은 은행과 우체국 강도, 기업 대상 공갈, 납치 몸값으로 이루어졌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무장조직의 소행으로 확인된 은행 강도는 219건이며, 이 가운데 조직의 성명이 발표된 것은 74건에 그친다. 조직 활동과 일반 범죄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은 이 자금 조달 방식의 결과이며, 특히 프롤레타리아 행동대의 경우 1975년 이후 개별 행동대의 강도가 조직 활동인지 개별 범죄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 사회적 기반의 소멸 === 극좌 무장조직은 결성 초기 노동 현장과 대학에서 일정한 묵인을 받았다. 조직에 직접 가담하지 않더라도 은신처를 제공하거나 신고하지 않는 형태의 소극적 지지가 존재했으며, 이 층의 규모는 1976년 시점에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이 기반이 소멸한 것은 두 사건을 통해서다. 첫째는 1977년 뒤발 사건이다. 좌파 정당의 국정 참여를 매개하려던 중도 정치인이 표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무장투쟁의 정치적 파산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이 일제히 절연을 선언했다. 둘째는 1979년 1월 콜마르 차량공장 노조 대의원 로베르 J. 셰뉘의 살해다. 셰뉘는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들의 재심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무장투쟁에는 반대해 온 인물로, 조직의 정체성이 근거한 사건의 무고함을 위해 싸우던 노동자를 조직이 노동자의 이름으로 살해한 셈이 되었다. 장례에 참여한 노동자는 5만 명을 넘었다. 이 두 사건 이후 은신처와 정보의 공급이 끊겼고, 1979년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대원은 전년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사회적 기반의 소멸이 군정의 물리적 진압과 겹치면서 극좌 무장조직의 활동은 1979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위축되었다. == 극우 테러 == === 두 계열 === 극우 진영은 1970년대에 두 계열로 나뉘었다. 하나는 [[공화국의 방패]]의 잔존 세력으로, 국가에 대한 보복을 동기로 하고 특무처와 경찰을 표적으로 삼았다. 다른 하나는 방패와 무관하게 등장한 신극우로, 의회 정치의 전복과 권위주의 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하고 불특정 다수를 표적으로 삼았다. 두 계열 사이에 조직적 연계는 확인되지 않으며, 인적 중복도 제한적이었다. 방패 잔존 세력의 활동은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이어졌다. 특무처가 사살한 방패 간부는 41명, 경찰에 검거된 행동대원은 약 200명이며, 1976년 지부 조직이 소멸했다. 검거된 인원은 노스클리프 훈련 이력을 진술했으나 훈련장의 소재를 특정하지 못했고, 진술은 신빙성 부족을 이유로 수사 기록에서 배제되었다. === 질서회복단 === 1972년 결성된 질서회복단은 신극우 계열의 중심 조직이다. 창설자 아르망 D. 케스텔은 방패 회원 경력이 없는 인물로, 조직은 방패의 반공주의를 이어받으면서도 국가 자체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방패와 달랐다. 극좌의 위협에 무력한 의회 정치를 무너뜨리고 권위주의 체제를 세우는 것이 목표였고, 그 수단으로 무차별 폭탄 테러가 선택되었다. 표적은 인물이 아니라 장소였다. 역, 광장, 열차처럼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곳에 폭탄을 설치해 사회 전체의 공포를 극대화하고, 그 책임을 극좌에 돌려 강경 대응 여론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사건 직후 극좌 조직의 명의로 성명을 유포하는 절차가 표준화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여러 사건에서 수사가 극좌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방식은 제방 계획의 논리를 국가의 지시 없이 국가를 상대로 실행한 것이다. 다만 목표가 달랐다. 제방 계획이 좌파의 정치적 기반을 제거해 기존 체제를 보전하려 한 것인 반면, 질서회복단은 기존 체제 자체를 무너뜨리고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했다. 질서회복단의 구성원 가운데 제방 계획을 알고 있던 인원은 확인되지 않으며, 조직이 이 방식에 도달한 것은 독자적 판단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 국가기관과의 관계 의혹 === 질서회복단과 국가기관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조직이 확보한 폭발물의 일부가 군용 규격이었다는 점, 여러 차례의 사전 첩보가 수사로 이어지지 않은 점, 1976년 오보레 중앙역 사건의 수사가 실질적으로 진전되지 않은 점이 근거로 거론된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이 문제를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으나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위원회는 군용 폭발물의 유출 경로를 특정하지 못했고, 첩보가 처리되지 않은 것이 조직적 방조인지 행정적 태만인지 판단할 자료가 없다고 기록했다. 이후 1985년 케스텔을 포함한 관련자 9명이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되었으나, 판결문에도 국가기관의 관여에 관한 판단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남은 것은 검은 10년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지속되는 주된 이유의 하나로 지적된다. == 조직범죄 == === 성장 === 정치 폭력과 나란히 조직범죄가 급성장했다. 중심은 남부의 항구도시 올덴버그를 근거지로 하는 [[올덴버그 마피아]]였다. 올덴버그는 고대에 기원을 둔 항구도시이자 19세기 말부터 이탈리아계 이민자가 대거 정착한 곳으로, 북부에 비해 행정·사법의 밀도가 낮은 남부의 조건 위에서 이민자 사회의 상호부조 조직이 1960년대를 거치며 범죄조직으로 전환되었다. 조직 자체는 스스로를 성 니콜라 형제단이라 칭했으며, 1966년 12월 베르코트 교도소에서 결성되었다. 성장의 결정적 계기는 공백이었다. 특무처는 자체 예산 항목이 없어 작전 자금의 상당 부분을 아편 거래로 조달했고, 그 국내 유통 부분은 1967년 이후 공화국의 방패가 장악하고 있었다. 1976년 방패가 소멸하면서 이 유통망이 통째로 비었고 올덴버그가 이를 접수했다. 조직의 정회원은 1973년 240명에서 1978년 610명으로 늘었으며, 1983년 900명으로 최성기에 이르렀다. === 납치 산업 === 납치가 독자적 사업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다. 정치 조직의 납치가 일상화되면서 몸값을 노린 납치가 그 안에 섞여 들었고, 수사기관은 정치적 납치와 영리 납치를 구분하지 못했다. 검은 10년 동안 접수된 납치 404건 가운데 정치 조직의 소행으로 확인된 것은 118건이며, 조직범죄의 소행으로 확인되거나 추정되는 것은 231건, 귀속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 55건이다. 1977년의 경우 접수된 84건 가운데 정치 조직의 소행으로 확인된 것은 19건에 불과했다. 조직범죄 집단이 정치 조직의 명의로 성명을 발표해 수사를 교란하는 사례가 반복되었기 때문에 당시 통계에서 양자의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납치의 결말을 보면 404건 가운데 석방이 268건, 살해가 61건, 구출이 43건, 미해결이 32건이다. 석방된 사례의 다수는 몸값 지급을 수반했으며, 1970년부터 1980년까지 지급이 확인된 몸값 총액은 약 1억 4천만 달러로 추산된다. 실제 지급액은 신고되지 않은 사례가 많아 이보다 상당히 클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 항쟁 === 조직 간 항쟁도 격화되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올덴버그와 롱비치의 사보이아 조직 사이에 벌어진 항쟁으로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발단은 방패의 붕괴로 비게 될 유통망의 선점 다툼이었으며, 사망자에는 조직원뿐 아니라 무관한 시민이 다수 포함되었다. 1977년 올덴버그 구시가 식당에서 발생한 총격으로 손님 6명이 사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항쟁은 1979년 양측 평의회 간 협정으로 종결되었다. 협정으로 올덴버그 항은 성 니콜라 형제단이, 롱비치항은 사보이아 조직이 관할하며 분쟁은 양측 평의원으로 구성된 합의체가 판정하기로 정해졌다. === 정치 폭력과의 혼입 === 조직범죄와 정치 폭력의 경계가 흐려진 것은 이 시기 통계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무장조직이 자금 조달을 위해 일반 범죄를 저질렀고, 범죄조직이 수사 교란을 위해 정치 조직의 명의를 사용했으며, 양쪽 모두 같은 무기 조달 경로를 이용했다. 접촉의 실체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다. 프롤레타리아 행동대가 무기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올덴버그 계열 조직과 접촉했다는 진술이 1980년대 협력자 진술에서 나왔으나 확인되지 않았고, 방패 강경파가 아편 유통 과정에서 조직범죄와 협력했다는 정황은 있으나 조직적 연계로 볼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 주요 사건 == === 롱비치 항만 창고 습격 === 1970년 8월 특무처는 롱비치 항만 창고에서 열린 [[공화국의 방패]] 지도부 회의를 습격해 총재 스트렐니코프를 포함한 9명을 사살했다. 사건은 아편 유통을 둘러싼 범죄조직 간 충돌로 위장되었고, 관할 경찰은 이를 조직범죄 사건으로 수사해 미제로 종결했다. 이 사건이 검은 10년의 실질적 출발점으로 간주되나, 사건의 성격이 알려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당시 방패 회원 대부분은 지도부의 죽음을 범죄조직과의 마찰로 받아들였고, 정부의 작전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은 강경파의 일부였다. === 벨포르 동부 지구 총격전 === 1971년 방패 강경파와 경찰 사이에 벨포르 동부 지구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경찰 4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방패의 성격을 알지 못한 채 무장 범죄조직으로 수사하고 있었고, 검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동 개조 소총으로 무장한 행동대와 정면으로 교전하게 되었다. 통상적 검거 역량을 넘어서는 화력을 보유한 집단이 도심에서 공권력과 교전한 첫 사례로 기록된다. === 콜마르 시청 광장 총격전 === 1974년 5월 콜마르 시청 광장에서 방패 강경파 약 40명이 경찰 저지선과 4시간 동안 교전해 경찰 7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했다. 행동대는 합법 구매 후 자동 개조한 소총과 사제폭탄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상태였다. 강경파를 이끌던 뤼시앵 바르도가 이 교전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은 루이나에서 도심 총격전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된 계기가 되었다. 사건이 대낮 시가지에서 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인근 건물의 주민이 대피하지 못한 채 교전에 노출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충격이 컸으며, 이후 각 시 경찰의 중화기 보유와 특수기동대 창설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 도네 납치 사건 === 1975년 6월 11일 [[프롤레타리아 행동대]]가 법무부 행형국장 폴 M. 도네를 벨포르 자택 앞에서 납치했다. 경호원 1명이 사망했다. 조직의 요구는 금품이나 수감자 석방이 아니라 조직의 성명을 주요 일간지 1면과 국영방송에 전문 게재·낭독하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협상을 거부했으나 33일이 지난 7월 14일 조직은 도네를 살려서 석방했다. 성명 일부가 지방 신문에 보도된 것을 요구가 충족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이유였다. 검은 10년의 주요 납치 가운데 인질이 생환한 유일한 사례이며, 이 석방 결정을 둘러싼 내부 분열로 조직의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 오보레 중앙역 폭발 === 1976년 8월 14일 오보레 중앙역 대합실에서 폭탄이 폭발해 63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했다. 검은 10년의 단일 사건 가운데 사망자가 가장 많으며, 루이나 현대사 전체에서도 최악의 테러로 기록된다. 여름 휴가철 토요일 오전이라 대합실에 평소의 세 배가 넘는 인원이 있었고, 폭발 지점이 대합실 중앙의 수하물 보관함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확대되었다. 사건 직후 극좌 조직의 소행이라는 성명이 유포되었고 초기 수사는 이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수사가 실질적으로 진전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으며, 질서회복단 관련자가 기소된 것은 헌정 회복 이후인 1985년이었다. 폭발물의 일부가 군용 규격이었다는 점과 사전 첩보가 수사로 이어지지 않은 점을 근거로 국가기관의 관여 의혹이 계속 제기되었으나 입증되지 않았다. === 베르통 정밀공업 폭파 === 1977년 2월 19일 [[10월 전선]]이 베르통 정밀공업 콜마르 공장의 신관 조립동을 폭파해 잔업 중이던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조직은 예고 원칙에 따라 40분 전 경고 전화를 걸었으나 공장 야간 경비실로 연결되지 않았다. 조직은 사흘 뒤 성명을 발표해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시인했다. 검은 10년의 무장조직이 자신의 행위로 인한 민간인 사망을 인정한 유일한 사례다. 이 사건으로 조직은 분열해 강경파 19명이 직접행동대라는 이름으로 분리해 나갔다. === 뒤발 납치·살해 === 1977년 4월 5일 [[혁명적 노동자동맹]]이 전 하원의장 앙리 뒤발을 벨포르 자택 인근에서 납치했다. 경호원 4명이 사살되었다. 뒤발은 좌파 정당의 국정 참여를 매개하려던 중도 정치인으로, 검은 10년의 폭력을 정치적으로 해소하려면 좌파를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고 이 구상은 당시 상당한 실현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조직이 그를 표적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좌파의 제도 편입은 무장투쟁의 명분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정부는 협상을 거부했다. 조직은 51일간 뒤발을 감금하고 인민재판을 진행했으며 5월 26일 그를 살해해 벨포르 시내에 유기했다. 감금 기간 뒤발이 쓴 서한 여러 통이 외부로 전달되었고 그 진위와 강요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사건의 정치적 결과는 조직의 의도와 반대였다. 좌파 정당의 국정 참여 구상은 완전히 무산되었고,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은 조직과의 절연을 공개 선언했으며, 대테러 입법과 대량 구금이 뒤따랐다. === 셰뉘 살해 === 1979년 1월 혁명적 노동자동맹이 콜마르 차량공장 노조 대의원 로베르 J. 셰뉘를 살해했다. 셰뉘가 공장 내 조직 세포를 사측과 경찰에 신고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셰뉘는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들의 재심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무장투쟁에는 반대해 온 인물이었다. 장례에 참여한 노동자는 5만 명을 넘었다. 이 시점까지 조직에 부분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노동 현장의 묵인이 사라졌고 은신처와 정보의 공급이 끊겼다. 검은 10년의 사건 가운데 무장조직의 사회적 기반을 가장 결정적으로 파괴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 폭력의 규모 == === 사망자 ===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가 경찰 통계를 재분류해 확정한 검은 10년의 사망자는 835명이다. 연도별로는 1970년 31명, 1971년 48명, 1972년 55명, 1973년 62명, 1974년 94명, 1975년 88명, 1976년 147명, 1977년 121명, 1978년 109명, 1979년 54명, 1980년 26명이다. 1976년이 최다인 것은 오보레 중앙역 폭발의 63명이 반영된 결과이며, 이 사건을 제외하면 1977년이 최다가 된다. 위원회는 이 835명 가운데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209명을 조직범죄 관련으로 재분류했다. 당시 경찰 통계가 조직범죄에 의한 사망과 정치 폭력에 의한 사망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재분류의 기준과 개별 사건의 판정 근거는 부속서에만 기재되어 공개되지 않았다. 이 재분류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논란이 있었고, 조직범죄 관련 사망자를 200명대 후반으로 보는 견해와 150명 내외로 보는 견해가 병존한다. 재분류 후 정치 폭력에 의한 사망자 626명의 내역은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무장조직원의 사망이 214명으로 가장 많으며, 여기에는 교전과 검거 과정의 사망뿐 아니라 폭발물 취급 사고와 조직 내부의 처형이 포함된다. 경찰과 군·헌병의 사망은 148명으로 경찰이 101명, 군과 헌병이 47명이다. 표적이 된 공직자와 법조인은 61명으로 법관 14명, 검사 9명, 교도 행정 종사자 21명, 기타 공무원 17명이다. 기업인과 관리직이 43명, 언론인이 7명이며, 사건과 무관한 시민의 사망이 153명이다. 무차별 폭탄 테러로 인한 사망은 141명이며 이 가운데 128명이 극우 조직의 소행으로 확인되거나 추정된다. 극좌 조직은 표적을 특정해 공격하는 방식이 중심이었으므로 사건 건수에 비해 사망자가 적었고, 극우 조직은 그 반대였다. 검은 10년의 사망자 통계가 극우 쪽으로, 사건 건수 통계가 극좌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은 이 전술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부상자는 4,100여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이 가운데 영구적 장애가 남은 사례가 900명을 넘는다. 다리 총격 피해자의 절반 이상이 여기에 포함된다. === 무장 공격 === 같은 기간 무장 공격은 3,861건이 집계되었다. 연도별로는 1970년 62건, 1971년 118건, 1972년 174건, 1973년 241건, 1974년 388건, 1975년 512건, 1976년 604건, 1977년 741건, 1978년 583건, 1979년 297건, 1980년 141건이다. 1977년의 741건은 하루 평균 두 건이 넘는 수치이며, 이 해가 사건 건수 기준의 정점이다. 귀속을 보면 극좌 조직의 소행으로 확인되거나 추정되는 것이 2,290건으로 전체의 59.3%, 극우 조직이 980건으로 25.4%, 귀속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 591건으로 15.3%다. 다만 이 비율은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는 극우 관련이 전체의 62%를 차지했으나, 1974년 이후 극좌 관련이 역전해 1977년에는 71%에 이르렀다. 방패 잔존 세력의 소멸과 극좌 무장조직의 확산이 시차를 두고 진행된 결과다. 공격의 유형은 재산 손괴와 방화가 가장 많았다. 3,861건 가운데 인명 피해를 수반하지 않은 것이 3,000건을 넘으며,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은 380여 건이다. 정당 사무소, 노조 사무실, 신문사, 기업 시설, 관공서가 주된 대상이었고, 차량 방화가 단일 유형으로는 가장 많았다. === 납치 === 접수된 납치는 404건이다. 연도별로는 1970년 4건, 1971년 9건, 1972년 14건, 1973년 22건, 1974년 37건, 1975년 51건, 1976년 66건, 1977년 84건, 1978년 62건, 1979년 38건, 1980년 17건이다. 귀속은 정치 조직 118건, 조직범죄 231건, 미상 55건이다. 결말은 석방 268건, 살해 61건, 구출 43건, 미해결 32건이다. 석방된 사례의 다수가 몸값 지급을 수반했으며, 지급이 확인된 몸값 총액은 약 1억 4천만 달러로 추산된다. 신고되지 않은 사례가 많으므로 실제 총액은 이보다 상당히 클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 무장 조직 === 확인된 무장 조직의 수는 1970년 4개에서 1973년 19개, 1977년 96개, 1979년 214개로 늘었다가 1980년 88개로 줄었다. 다만 이 수치는 성명을 발표한 명의의 수를 집계한 것이므로 실체 있는 조직의 수와 크게 다르다. 1979년의 214개 가운데 3건 이상의 공격이 확인된 조직은 21개, 10건 이상은 6개에 불과했다. 하나의 조직이 사건마다 다른 이름으로 성명을 내는 사례가 빈번했고, 조직명을 도용해 무관한 범죄를 정치적 행위로 포장하는 경우도 확인되었다. 조직 수의 급증 자체가 폭력의 확산을 보여주는 지표로 인용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성명 발표라는 행위가 확산된 것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다. === 통계의 한계 === 검은 10년의 통계는 여러 층위에서 신뢰도의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조직범죄와 정치 폭력의 구분이 사후 재분류에 의존하며 그 기준이 공개되지 않았다. 둘째, 특무처와 공화국의 방패의 교전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별도로 집계되지 않아 전체 수치에 포함되어 있으나 그 규모가 확인되지 않는다. 셋째, 군정기인 1978년 하반기부터 1980년까지의 통계는 군정 최고회의가 관리한 자료에 근거하므로 초법적 조치로 인한 사망이 반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군정기 무장조직 관련자로 지목되어 사망한 인원 가운데 재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사례가 상당수 존재한다. 이 때문에 실제 사망자를 900명에서 1,100명 사이로 추정하는 연구가 여럿 제출되어 있으나, 공식 통계를 대체할 만한 자료는 확보되지 않았다. == 국가의 대응 == === 수사 체계의 한계 === 검은 10년 초기 국가의 대응이 무력했던 구조적 원인으로 경찰 조직의 파편화가 지목된다. 루이나는 단일 국가경찰을 두지 않고 각 부처가 소관 영역별로 경찰기관을 보유하는 체계를 유지해 왔다. 법무부가 광역범죄조사과와 경찰국을, 국무부가 기동경찰국을, 운수부가 교통·지하철 경찰국을, 국토안보부가 공항·고속도로·항만 경찰국을 각각 두는 식이다. 무장조직의 활동이 도시와 관할을 넘나들면서 이 체계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났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문제가 반복되었다. 첫째, 같은 조직의 사건이 관할에 따라 다른 기관에 분산 접수되어 동일 조직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늦게 파악되었다. 둘째, 기관 간 정보 공유의 법적 근거가 없어 수사 자료의 교환이 개별 협조 요청에 의존했다. 셋째, 각 기관의 장비와 훈련 수준이 크게 달라 중화기로 무장한 집단에 대응할 수 있는 기관이 제한적이었다. 법무부 광역범죄조사과가 전국 단위 수사를 담당했으나 인력과 권한이 부족했다. 1974년 시점의 정원은 2,400명으로, 같은 해 무장 공격 388건을 처리하기에는 크게 미달했다. 1975년 조사과 내에 정치폭력전담반이 신설되었으나 정원은 180명에 그쳤다. === 입법 === 입법적 대응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1975년 총포화약류단속법 개정으로 총기의 자동 개조가 별도의 범죄로 규정되고 처벌이 강화되었다. 다만 이미 개조되어 유통된 물량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총기 소지 자체를 제한하는 방안은 논의되었으나 입법에 이르지 못했다. 1977년 뒤발 사건 직후 반테러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었다. 무장조직 가입 자체를 처벌 대상으로 하고, 구속 기간의 연장과 통신 감청의 요건 완화를 규정했으며, 무장조직 관련 사건에 대한 특별재판부의 설치를 담았다. 이 법은 3년 한시법으로 제정되었으나 군정기에 무기한 연장되었고, 1981년 헌정 회복 후 개정을 거쳐 존속했다. 1981년 헌정 회복 이후 제정된 협력자 감형 제도가 마지막 단계다. 조직 정보를 제공한 구성원에게 대폭적인 감형을 부여하는 이 제도가 실제로 무장조직을 해체시킨 결정적 수단이 되었다. === 사법 === 사법적 대응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미결 구금의 장기화였다. 반테러 임시조치법으로 구속 기간이 연장되면서 재판 없이 수년간 구금되는 사례가 발생했고, 1980년 시점에 무장조직 관련 혐의로 미결 구금 상태에 있던 인원은 1,900명을 넘었다. 이 가운데 최종적으로 무죄가 선고되거나 공소가 취소된 인원이 30%에 달해, 구금 자체가 처벌로 기능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무장조직 관련 혐의로 기소된 인원은 4,317명이며 유죄가 확정된 인원은 2,884명이다. 유죄 확정자 가운데 실제 무장 활동에 가담한 인원은 절반에 미치지 못하며, 나머지는 은신처 제공, 자금 전달, 문건 배포 등 지원 행위로 처벌받았다. 법조계 자체가 표적이 되면서 재판의 정상적 진행도 어려웠다. 검은 10년 동안 법관 14명과 검사 9명이 살해되었고, 무장조직 관련 사건을 담당한 법관에 대한 협박은 일상적이었다. 1977년 이후 특별재판부의 법관 명단이 비공개로 전환되었으며, 일부 재판은 교정 시설 내에 설치된 법정에서 진행되었다. === 군정의 진압 === 1978년 10월 성립한 군정은 통상의 형사 절차를 적용하지 않는 방식의 진압에 착수했다. 계엄 아래 군사재판이 무장조직 관련 사건을 관할했고, 체포와 구금에 영장주의가 적용되지 않았으며, 국가정보국이 국내 사찰에 전용되었다. 진압의 효과는 통계에 반영되었다. 무장 공격은 1978년 583건에서 1980년 141건으로 4분의 1 수준까지 감소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진압은 무장조직에 국한되지 않았다. 정치인·언론인·노동운동가가 무장조직과의 연계 혐의로 대량 구금되었고, 군정기 구금 인원은 1979년 한 해에만 12,000명을 넘었다. 이 가운데 무장조직과 실제로 관련이 있었던 인원의 비율은 확인되지 않는다. 군정의 진압이 검은 10년을 종식시켰다는 평가는 통계적으로는 뒷받침되나, 조직의 지휘 구조가 실제로 해체된 것은 헌정 회복 이후의 협력자 제도를 통해서였다는 점에서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여진다. 군정 붕괴 직후인 1981년 무장 공격 건수가 다시 증가한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 사회 == === 일상 === 검은 10년의 특징은 대형 사건보다 소규모 폭력의 지속에 있었다. 은행 강도, 정당 사무소 방화, 신문사 습격, 하급 공무원과 경찰관에 대한 총격이 거의 매일 발생했고, 이 사건들은 개별적으로는 보도되지 않을 만큼 일상화되었다. 기업 임원과 법관은 경호 없이 출퇴근하지 못했다. 1977년 조사에서 종업원 500명 이상 기업의 임원 가운데 경호를 받는 비율은 71%였고, 출퇴근 경로를 매일 변경하는 관행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방탄 유리와 방탄 차량의 수입이 급증해 1978년 방탄 차량 등록 대수는 1972년의 14배였다. 우편물 검사도 일상이 되었다. 우편물을 이용한 폭발물 배달이 검은 10년 동안 88건 확인되면서 주요 기관과 기업이 우편물 검사 절차를 도입했고, 이 절차는 폭력이 종식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 도시 경관과 경비 산업 === 벨포르와 콜마르의 주요 관공서에는 차량 폭탄에 대비한 진입 방지 구조물이 상설 설치되었다. 청사 앞 도로의 폭을 좁히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배치하는 방식이 표준화되었으며, 이 구조물 가운데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 벨포르 중앙청사 앞 광장의 현재 형태도 이 시기에 확정된 것이다. 민간 경비 산업이 급성장했다. 등록된 민간 경비업체는 1970년 90여 개에서 1979년 640여 개로 늘었고, 종사자는 같은 기간 약 4,000명에서 31,000명으로 증가했다. 경비 산업의 성장은 이후 문제를 낳았다. 업체 상당수가 무장 인력을 보유하면서 규제 공백이 발생했고, 일부 업체가 공화국의 방패와 올덴버그 마피아의 자금 세탁 경로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1980년대에 확인되었다. === 언론 === 언론은 표적이자 매개였다. 검은 10년 동안 언론인 7명이 살해되었고 신문사와 방송사에 대한 습격은 40건을 넘었다. 동시에 무장조직은 언론을 통한 성명 전달을 활동의 핵심으로 삼았으므로, 언론이 성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반복적인 쟁점이 되었다. 1977년 뒤발 사건 이후 주요 일간지가 무장조직 성명의 전문 게재를 자율적으로 중단했다. 성명의 전달 자체가 조직의 목표를 달성시켜 준다는 판단이었으며, 이 결정은 언론계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낳았다. 다만 조직은 지방지와 소규모 매체를 통한 전달로 대응했고, 1975년 도네 납치 사건에서 조직이 지방 신문의 부분 보도를 요구 충족으로 간주한 사례처럼 이 대응이 실효를 거둔 경우도 있었다. 군정기에는 검열로 언론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이 기간 무장조직이 발행한 유인물과 지하 신문이 검열되지 않은 정보의 통로로 기능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했으며, 특히 10월 전선의 지하 신문은 조직의 이념과 무관하게 일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여론 === 여론은 양극단을 동일시하는 이른바 양극단론으로 기울었다. 좌우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되 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정서가 확산되었고, 이 정서는 정치 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1977년 조사에서 의회가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응답은 19%였으며, 같은 조사에서 군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본 응답은 34%였다. 1978년 군사반란이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은 배경이 여기에 있다. 양극단론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비판이 있었다. 사망자와 사건의 성격이 좌우 양쪽에서 크게 다른데도 이를 동일시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 인식이 실제로는 강경 대응 여론을 형성해 극우의 목표에 부합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적이었다. 다만 이 비판은 당시 소수 의견이었다. === 인구 이동 === 폭력의 장기화는 인구 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의 국외 이주는 이전 5년 대비 34% 증가했으며, 특히 전문직과 기업 관리직의 이주 비율이 높았다. 국내에서는 벨포르·콜마르 등 폭력이 집중된 도시에서 근교로의 이주가 늘어 이 시기 대도시 인구 증가율이 둔화되었다. 이주는 폭력이 종식된 뒤 상당 부분 되돌아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국외 이주는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이 시기 이주자의 귀국이 1980년대 후반 경제 회복의 한 요인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 문화적 재현 === 검은 10년은 사건 당시에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검열과 소송 위험, 그리고 사건이 진행 중이라는 점 때문에 1980년대 중반까지 이 시기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본격적인 재현은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1987년 개봉한 영화 《11월의 거리》가 도심 총격전을 처음으로 재현했고, 1990년대에는 아르덴역 사건의 오심을 다룬 작품이 잇달아 발표되었다. 1998년 재심 이후에는 제방 계획의 존재를 전제로 한 재현이 늘어, 국가의 조작을 중심에 놓는 서사가 일반화되었다. 이 재현의 경향에 대해서는 비판도 있다. 국가의 조작을 강조하는 서사가 무장조직의 책임을 상대적으로 희석시키며, 특히 뒤발 사건과 셰뉘 살해처럼 조직의 판단이 명백히 문제였던 사건이 축소된다는 지적이다. == 종결 == === 협력자 감형 제도 === 검은 10년은 군정의 물리적 진압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헌정 회복 이후의 제도적 조치였다. 1981년 제정된 협력자 감형 제도는 조직 정보를 제공한 구성원에게 대폭적인 감형을 부여했으며, 조직의 구조와 은신처, 미해결 사건의 실행자에 관한 정보가 제도 도입 직후부터 쏟아져 나왔다. 제도가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조직의 구조 자체에 있었다.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종대 구조는 검거에 대한 저항력이 높았으나 협력자에게는 무력했다. 종대장 한 명의 진술로 해당 종대 전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지원 조직 층에서 협력자가 다수 나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 층은 무장 활동에 직접 가담하지 않아 형량이 낮았고 조직에 대한 충성도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이 제도의 적용을 받은 인원은 약 380명이다. 제도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인원이 진술만으로 감형받는 것이 형평에 어긋나며, 감형을 노린 허위 진술로 무고한 인원이 처벌받은 사례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 마지막 검거 === 1982년 뒤발 사건에 관여한 혁명적 노동자동맹 전략지도부 인원이 전원 검거되면서 대규모 무장조직은 모두 사라졌다. 2세대 지도자 알랭 R. 도르망은 1982년 4월 롱비치에서 검거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조직은 그 이전에 소멸했다. 프롤레타리아 행동대는 1976년 11월 콜마르 은신처 급습으로 지도부를 잃고 1977년 소멸했으며, 협력자 감형 제도가 도입되기 4년 전에 물리적으로 제거된 유일한 주요 조직이다. 10월 전선은 1980년 12월 목적 달성을 이유로 자체 해산을 선언했는데, 이는 검은 10년의 무장조직 가운데 스스로의 결정으로 해산한 유일한 사례다. === 종결의 요인 === 검은 10년이 종결된 요인에 대해서는 네 가지가 함께 지적된다. 첫째는 사회적 기반의 소멸이다. 뒤발 사건과 셰뉘 살해로 무장조직은 자신을 묵인하던 층을 잃었고, 이는 은신처와 정보의 공급이 끊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둘째는 군정의 물리적 진압이다. 초법적 수단을 동원한 소탕으로 조직의 활동 여력이 크게 줄었다. 셋째는 협력자 감형 제도다. 조직의 지휘 구조를 실제로 해체한 것은 이 제도였다. 넷째는 조건의 소멸이다. 청북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회복 국면에 들어갔으며, 헌정 회복으로 제도 정치의 통로가 다시 열렸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결정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군정의 진압을 강조하는 견해는 통계상의 급감 시점을 근거로 삼고, 협력자 제도를 강조하는 견해는 조직의 실질적 해체 시점을 근거로 삼는다. 사회적 기반의 소멸을 강조하는 견해는 1979년 이후 조직이 이미 활동 능력을 잃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 진상 규명 == === 정보기관 조사위원회 === 1980년 헌정 회복 후 설치된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는 군정기 국가정보국과 광역수사국의 국내 사찰을 조사하고 의회 정보위원회의 감독과 정보감찰관 제도의 도입을 권고했다. 위원회의 활동으로 정보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으며, 이는 검은 10년이 남긴 제도적 성과로 평가된다. 다만 조사 대상은 정보공동체 등재 기관으로 한정되었다. 제방 계획을 실행한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특무처]]는 1977년 이미 폐지되었고 그 후신 조직은 정보공동체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어느 쪽도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위원회는 국방부 법무관실의 진술과 예산 자료를 근거로 특무처에 관한 부속서를 작성했으나 이 부속서는 공개되지 않았고, 그 존재가 확인된 것은 1996년 민사소송 과정에서다. === 소송과 재심 === 제방 계획의 존재가 부분적으로나마 공적으로 확인된 것은 1996년 민사소송과 1998년 재심을 통해서다. 아르덴역 사건 유족회는 1996년 국방부를 상대로 자료 공개를 청구했고 국방부는 해당 조직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회신했으나, 이 과정에서 1981년 부속서의 존재가 드러났다. 1998년 아르덴역 사건 재심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던 11명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재심 법원은 유죄의 근거였던 첩보의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으나 실행 주체는 특정하지 않았다. 2004년 유족회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는 행위 주체 불특정을 이유로 각하되었다. === 미해결 === 검은 10년의 상당수 사건이 미해결로 남아 있다. 오보레 중앙역 폭발은 1985년 실행자가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되었으나 지시 계통과 폭발물의 출처는 규명되지 않았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살해된 특무처 요원 6명의 사건은 관할 경찰이 강도 살인 등으로 수사해 전부 미제로 종결되었으며, 이 사건들의 성격은 지금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군정기 무장조직 관련자로 지목되어 사망한 인원 가운데 재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사례에 대해서도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례 진상 규명 요구가 제기되었으나, 관련 기록의 상당 부분이 특무처 후신 조직으로 이관되어 국가기록관리법상 이관·공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으므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다. == 평가 == === 국가 책임론 === 검은 10년에 대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국가가 좌파를 억누르기 위해 만든 폭력이 국가로 되돌아온 과정이라는 것이다. 제방 계획으로 양성된 극우 조직이 통제를 벗어나 국가와 교전했고, 그 계획에 의해 누명을 쓴 극좌 조직이 실제로 무장했으며, 조직범죄는 계획이 만든 유통망의 공백을 물려받아 성장했다. 세 갈래의 폭력이 모두 하나의 계획으로 소급된다는 점에서 이 해석은 강한 설명력을 갖는다. 이 해석은 1998년 재심 이후 사실상 통설의 지위를 얻었으며, 검은 10년을 다루는 교과서와 개설서의 서술도 대체로 이 틀을 따르고 있다. === 반론 === 반론은 인과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제방 계획의 규모가 실제 무장투쟁을 설명할 만큼 컸는지에 대한 의문이 그 핵심이다. 위장 테러는 여섯 건이었고 사망자는 32명이었으며, 누명을 쓴 인원은 11명이었다. 이 규모가 10년간 835명이 사망한 폭력의 원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작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근거로는 세 가지가 제시된다. 첫째, 재편된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대원 다수는 원 동맹과 무관한 신규 인원이었다. 둘째, 프롤레타리아 행동대의 대원 다수는 정치적 동기 없이 참여한 일반 수형자였고,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 본인들은 조직을 거부했다. 셋째, 10월 전선은 제방 계획과 무관하게 청북전쟁 반대 운동에서 발생했다. 이 견해는 1970년대 초 루이나의 조건 — 합법적 총기 환경, 전쟁과 제대군인의 유입, 경제 위기, 좌파의 대표성 결핍 — 자체가 무장조직을 발생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제방 계획은 그 조직들에 서사를 제공한 요소였다고 본다. === 유산 === 검은 10년이 루이나 사회에 남긴 것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정치 제도에 대한 장기적 불신이다. 국가가 자국민을 상대로 테러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제도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지 않았고, 이 불신은 이후에도 정치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가의 조작 가능성을 먼저 의심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는 무장 시위 문화의 정착이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인원이 합법 구매한 총기를 개조하고 사제폭탄으로 무장한 채 경찰과 도심에서 교전하는 형태의 시위는 공화국의 방패 이전에는 기록되지 않으며, 검은 10년을 거치며 루이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로 굳어졌다. 노스클리프 훈련 수료자 약 1,100명 가운데 사망하거나 검거된 인원이 300명 미만이었고 나머지가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채 사회로 돌아갔다는 점이 이 확산의 직접적 경로로 지목된다. 1989년 [[루이나 헌정 위기|헌정 위기]]에서 극우 무장조직이 의사당을 공격한 것도 이 연속선상에서 이해된다. 셋째는 정보기관에 대한 감독 제도다. 1981년 도입된 의회 정보위원회의 감독과 정보감찰관 제도는 검은 10년이 남긴 유일한 제도적 성과로 평가된다. 다만 이 감독은 정보공동체 등재 기관에만 미치므로, 제방 계획을 실행한 조직의 후신은 여전히 어떤 감독도 받지 않는다. == 관련 문서 == * [[루이나/역사]] *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 * [[루이나 국방부 특무처/역사]] * [[공화국의 방패]] * [[혁명적 노동자동맹]] * [[프롤레타리아 행동대]] * [[10월 전선]] * [[올덴버그 마피아]] * [[10.10 군사반란]] * [[10.24 시민혁명]] * [[청북전쟁]] * [[MIA|광역수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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